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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가 세계 최초로 밝힌 북한의 핵개발 진실!
1- 1990년 핵개발부대인 3공병국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파견하여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에 핵미사일기지 건설이 진행되고 있음을 최초로 밝히고, 그 기지는 한반도에서 일본 동경과 가장 가까운 대일 전략기지란 사실을 밝혔다. 그후 그 정보대로 무수단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일본을 향해 날아갔다. 2- 1994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 핵실험장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위치에 대해 최초로 밝혔다. 3- 북한이 구소련에서 밀수한 붉은 수은으로 플루토늄을 추출한 정보를 최초로 밝혔다. 대한민국에 와서 붉은 수은에 대한 정보를 말해 주었지만, 당시만 해도 남한에서 붉은 수은의 용도에 대해 아는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국방과학연구소 신성택 박사가 미국 원자력 학회에서 1980년에 발행한 '플루토늄 핸드북'이란 책을 읽고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4-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베릴륨(북한 사전엔 베르니움으로 기록됨)을, 북한이 러시아에서 밀수한 정보를 최초로 밝혔다. 5-북한에 매장된 우라늄 광석에 함유된 희유금속들의 종류와 그 함유량에 관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6- 북한의 우라늄생산이 염출추출공법에서 산법추출공법으로 바꾸며 대량생산을 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7- 우라늄폐기물처리에 대한 기술적 과정을 최초로 공개했다. 8- 평산 남천 화학공장의 우라늄생산 능력에 대해 최초로 공개했다. 9- 영변핵단지는 분강지구란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0- 분강지구는 비록 영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분강지구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충성동으로 되어 있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1- 영변 핵시설의 방사화학실험실은 우라늄폐연료봉 재처리를 하는 12월기업소란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2- 1987년 영변핵단지에서 플루토늄추출 실험과정에 발생한 맹독성가스에 의해 3명의 과학자들이 평양 봉화진료소에 실려 간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사실 영변핵시설의 12월 기업소에서는 1987년에 플루토늄 추출 첫 실험에서 실패했다. 당시 실험과정에 발생한 맹독성 가스에 중독된 과학자들이 평양 봉화진료소에 실려 가기도 했었다. 수은과 플루토늄이 결합된 아말감을 채취해 가열하면 섭씨21도에서 3백25도 사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상급의 순수 플루토늄 239만 녹아내리는데, 이 과정에 발생하는 맹독성 가스는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분강지구에는 그 과학자들이 모두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3- 영변 핵시설인 분강지구 8월기업소에서 우라늄연료봉을 생산한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4- 영변 핵시설인 분강지구에 핵개발부대 43여단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5- 국제사회는 박천군에 우라늄생산 공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운전군 동삼리에 있는 우라늄생산 공장(분강지구 4월기업소)이란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6- 4월기업소(우라늄생산 공장)는 원래 구소련과 합작한 흑연생산 공장이었고, 구소련 설비들로 갖추어져 있었던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7- 1980년대까지 분강지구 4월기업소의 우라늄정광 생산능력이 연간 12톤이었던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8- 4월기업소에서 우라늄추출에 2밀리 수지알갱이를 사용했는바, 때론 2밀리 모래알을 채취하여 대신하기도 했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19- 1987년부터 영변 핵시설에서 우라늄을 고농축하고 나머지 폐액(옥수수가루 죽같이 누런색)을 4월기업소로 보내어 재-정련했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20- 순천광산의 우라늄광석이 고갈되면서 분강지구 4월기업소(우라늄생산 공장)를 폐쇄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21- 박천군 맹중리에 있는 108연구소(분강지구 소속)를 최초로 공개했다. 22-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원자력공업부를 최초로 공개했다. 23- 서평양에 있는 101연구소(원자력공업부 산하)를 최초로 공개했다. 24- 1986년에 원자력위원회가 원자력공업부로 개편되면서, 분강지구는 원자력공업부와 분리되어 5기계공업총국으로 중앙당 직속이 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25- 중앙당 131지도국(핵개발지도국)에 대해 최초로 공개했다. 26- 핵개발부대 3공병국에 대해 최초로 공개하며, 김정일위원장이 “3공병국은 나의 친위대”라고 말한 사실을 최초로 공개했다. 27- 지하핵시설을 전담하는 49여단이 일본에서 수입된 트럭들뿐만 아니라 굴착기, 유압설비, 수중 펌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장비들로 무장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28- 1992년 5월 1차 핵사찰 당시에 현장에서 있었던 중요 비밀정보들을 최초로 공개했다. 29- 710호 핵개발 자금에 대해 최초로 공개했다. 30- 은행 특수자금과에서 710호 자금을 관리하며 94돈자리(계좌)에서 지출된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31- 대안 중기계공장에 710호 지휘부가 있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32-1991년 구소련 해체 후 듀브나 핵연구소에 파견되어 있던 북한 과학자들이 철수하면서 포섭해온 러시아 핵개발 관련 핵심과학자들을 정무원 총리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고, 정치국위원들이 사는 특별지구(보통강역에서 광복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보통강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위치)의 저택을 제공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당시 평양시 평천구역 원자력공업부 숙소에도 구소련 과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33- 1991년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북한의 핵개발이 전반적으로 동결된데 대처하여 내린, 김정일 조직비서의 6월 21일 친필지시 내용을 최초로 공개했다. 34- 핵개발 설비 수입을 전담한 ‘조선 제6설비수출입회사’(원자력공업부 소속)를 최초로 공개했다. 35- ‘조선 제6설비수출입회사’ 수출입과장 이권대가 일본에 본사를 두고, ‘대동강지사’ 지사장 명함을 갖고 활동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36- 장성택의 맏형인 장성호(당시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의 환갑 연월일과 저택 위치를 최초로 공개했다. 말레시아 대사였던 장용철(장성호 아들)과 친구 사이였으므로 관련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37- 태권도전당 주석단으로 올라가는 김일성-김정일 전용 에스컬레이터를 체코에서 수입하려다 외화 사정으로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것을 최초로 공개했다. 38- 태권도국장 박억년의 집 위치를 최초로 공개했다. (핵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서 중국측과 면담을 마치고 평양에 밤늦게 도착하여 그의 집에서 잔 적이 있다.) 39-박억년이 101연락소 부소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되어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박억년과 핵개발자금 확보를 위해 함께 활동한 적이 있으므로 관련 정보를 상세히 알수 있었다. (그 후 한국에 와서 김정일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을 통해 박억년이 정치범수용소에 간 사실도 알게 되었다.) 40- 101연락소 현관에 걸린 대형 벽화에 대해 최초로 정확히 공개했다. 당시 그 벽화에는 김정일이 연락소 전투원들과 함께 한 형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연락소 전투원들은 조국 통일의 전초병입니다”고 한 김정일의 말이 있었다. 당시 핵개발자금 확보를 위한 업무상 101연락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41- 장성택의 조카인 장용철(전 말레이시아 대사)과 함께, 박억년과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의 전화통화를 곁에서 들었던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42- 강선제강소에서 생산된 강재 2천 톤을 중국 도문으로 수출할 당시의 편법 과정을 최초로 공개했다. 43- 평양시 중이에 국방대학을 새로 건설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당시 핵개발 자금 확보를 위한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국방대학 건설을 지원하였다. 44- 북한 핵개발을 주도한 전병호 군수산업담당 비서와 박송봉 1부부장에 대한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45- 1994년 이전 북한의 초정밀기술이 너무도 낙후(유압설비조차도 만들 수 없었던 상황)하여 핵실험을 할 수 없었던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이 위성사진에 대한 관련 정보를 최초로 공개했다.
이 위성사진이 영변핵시설 분강지구에 있는 우라늄생산 공장이다. 사진에서 화살표 끝에 본인이 살았던 집이 있다. 집 앞의 텃밭과 주변의 과수원까지도 뚜렷이 보인다. 이 집은 본인이 평산 우라늄생산 공장조업을 위한 기술 인력으로 소환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이 사진에서 본인이 뒤로 보이는 건물은 북한 최대 규모의 평산 우라늄생산 공장이다. 전기 철조망이 있는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장은 무장보위대가 경비를 맡고 있었다. 2개의 쌍둥이로 앞에 4층 건물이 보이는데, 실제는 3층 건물이다. 건물의 오른쪽 3층에 본인의 사무실이 있었다. 본인은 이곳에서 만 29세에 부직장장으로 승진하여 초급단 부비서와 간부들을 관리하는 당 세포비서를 역임하며 김일성종합대학, 핵물리대학, 김책공업대학 등 북한의 일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을 거느리며,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한 책임기사(김석철) 등을 당에 입당시키기도 했다.
이 사진은 위성에서 내려 찍은 평산 우라늄생산 공장이다. 1번과 1-1번은 우라늄 침출직장, 2번은 우라늄추출직장, 3번은 바나듐 생산직장, 4번은 몰리브덴-니켈-라듐 등을 추출하고 우라늄폐액 처리하는 직장, 5번은 석회를 굽는 로, 6번은 석회석을 하차하는 곳, 7번은 황산탱크들, 8번은 운수직장, 9번은 생필품직장, 10번은 보일러 열관리직장, 11번은 자재창고, 12번은 전용선직장, 13번은 선탄직장, 14번은 공무직장, 15번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청사, 16번은 연유저장고, 17번은 1992년 5월 핵사찰을 받았을 때 우라늄 잔사들을 은폐했던 곳, 18번은 공장탁아소, 19번은 보위대이다. 이외 501연구소가 담장 밖에 있다. 이처럼 본인은 북한의 핵 개발시설 위성사진들을 판독할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다. 이 우라늄 생산공장 조업을 앞두고 기술적 결함으로 가동할 수 없는 위기에서 평성 설계연구소와 대안 중기계 제작자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회피하는 상황에서 북한 최고의 기술자들과 연구사들이 총동원해도 원인을 못찾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 우라늄생산 공장 가동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보고한 날짜에 조업할 수 있도록 하면서, 나는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한 전병호비서와 박성봉 1부부장의 인정과 총애를 받게 되었다. 김대호의 탈북 동기
1992년 초 미국의 경제 봉쇄로 핵개발이 동결되었다.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1994년 제네바회담 협의에 의해 북한의 핵개발을 동결시켰었다고 여기지만, 사실 북한의 핵개발은 1992년 초에 대부분 동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핵개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완전히 파괴되고 몰락한 상태였다.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 때문이었다. 영변 핵단지에 건설 중이던 50MWe 원자로와, 태천에 건설 중이던 200MWe 원자로 공사도 중단되었다. 1994년 10월에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문을 보면 그 원자로들과 핵연료봉 제조시설(영변 핵단지에서는 8월기업소라고 부름)을 동결시키는 조건이 포함되었는데, 이미 2년 전 1992년에 그 핵개발 시설들은 전면 동결되었던 것이다. 이어 핵개발부대 49여단이 건설하던 지하핵시설 공사도 중단되고, 핵개발부대 47여단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건설하던 무수단 핵미사일기지 공사도 중단되었다. 1992년 1월 우라늄 생산이 중단되면서 우라늄(핵)연료봉 생산도 중단되었다.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 때문에 외화가 고갈되어 우라늄생산에 첨가되는 원료들을 수입할 수가 없고, 우라늄생산에 필요한 시설의 원자재들도 수입하지 못하면서 핵개발이 동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1992년 1월 우라늄생산 공장은 전체 공정을 멈추고 바나듐 생산으로 전환하였다. 평산, 금천 지방에 매장된 3호 광석에는 우라늄 0.8%, 바나듐 1.4%가 함유되어 있는데, 우라늄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바나듐 생산으로 전환한 것이다. 바나듐 생산에 첨가되는 황산은 북한이 자체생산을 하고 있었고, 또 바나듐은 기계를 가동하지 않고도 토법이라고 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김정일의 친필 지시에 의해 핵 개발자금 확보를 위한 외화벌이 사업을 책임지면서 그 바나듐을 수출하려고 많이 애썼지만,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판로를 개척할 수가 없었다. 1990년대 초에 들어와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소외 계층으로 밀려난 핵개발 기술자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자 플루토늄 생산물질인 붉은 수은과, 핵무기 제조에 꼭 필요한 물질로 플루토늄 핵 분열시 도화선 역할을 하는 베릴륨(북한 사전엔 베르니움으로 기록되어 있음) 등 핵개발에 사용되는 물질들을 유출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홍수라고 불리는 붉은 수은(산화수은)은 1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 약 1킬로그램이 필요하다. 당시 북한에서 자체 생산한 붉은 수은의 질이 불량하여 플루토늄을 제대로 생산할 수가 없었다. 붉은 수은은 1킬로그램짜리 2개를 묶어 하나의 포장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제품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투명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 베릴륨은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판으로 되어 있고, 거기엔 제품 설명서와 생산연도가 쓰여 있었는데, 생산연도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으로 쓰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러시아에서 밀수되는 핵 물질들은 플루토늄 1킬로에 50만 달러, 농축우라늄은 10만 달러, 붉은 수은은 15.000 달러, 베릴륨은 1.500 달러에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수은은 김정일의 관심이 컸던 물질이다. 플루토늄에 비해 가격이 많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그것만 있으면 북한 자체 내에서도 얼마든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붉은 수은 4킬로와 베릴륨이 평양까지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그것들을 구입하기 위해 원산에 돈 주가 들어와 있다는 정보가 밀수꾼들 속에서 나돌았다. 김정일은 그 사실을 보고 받고, 그 붉은 수은과 베릴륨을 해외에 넘긴 자는 민족 반역자로 처형하라고 지시하며, 박송봉 1부부장에게 그 붉은 수은과 베릴륨을 무조건 찾아내서 사들이라고 특별 지시를 하였다. 전병호비서와 함께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한 박송봉은 그 지시를 받고 몹시 난감했다. 그것들을 찾아내려면 밀수꾼들과 접촉해야 하는데, 그 세계를 너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송봉은 나에게 그 붉은 수은과 베릴륨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평양의 밀수꾼들은 대부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송봉은 나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중국 길림성 연길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부친은 항일운동을 하면서 김일성을 도왔다. 그리고 나는 그가 출생한 연길과 인접한 왕청에서 출생했는데, 그곳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근거지가 있던 지역이다. 할아버지는 그 지역의 지하조직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김일성 빨치산 근거지에 식량을 공급해 주셨다. 그때 할아버지와 연계하고 있던 연길 지하조직의 책임자는 김택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연길 조직에 림춘추(전 북한 부주석), 박영순(전 혁명박물관 관장) 등이 속해 있었다. (김택선의 아들은 구성 비행대에서 근무했었다.) 6.25 전쟁 시기 부모님은 중국 목단강 시에 있는 조선인 학교에 계셨는데, 그때 김정일과 김경희 남매가 그곳에 피난 와 있었다. 그 후 부모님은 1963년에 4살 난 나를 업고 귀국하셨는데, 박송봉도 중국에서 출생하여 북한으로 귀국한 것이다. 박송봉은 이 같은 공통점으로 인해 나를 좋아 했다. 평산 우라늄생산 공장에서 매일 오후 2시에 진행되는 사장단 회의를 그가 주재할 때는, 나를 본보기 내세워 칭찬해 주곤 했다. 그 사장단에서 최연소(당시 29세)였던 나를 본보기로 내세움으로서, 다른 간부들에게도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날 박송봉은 붉은 수은 4킬로면 4킬로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1기의 핵미사일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밀수한 붉은 수은을 가지고, 이미 8킬로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고 했다. 사실 영변핵시설의 12월 기업소에서는 1987년에 플루토늄 추출 첫 실험에서 실패했다. 당시 실험과정에 발생한 맹독성 가스에 중독된 과학자들이 평양 봉화진료소에 실려 가기도 했었다. 수은과 플루토늄이 결합된 아말감을 채취해 가열하면 섭씨21도에서 3백25도 사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최상급의 순수 플루토늄 239만 녹아내리는데, 이 과정에 발생하는 맹독성 가스는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분강지구에는 그 과학자들이 모두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1989년 초 12월기업소에서는 플루토늄 추출에 성공했다. 북한에서 자체 생산한 붉은 수은으로는 순수 플루토늄 추출이 어려웠으므로, 러시아에서 밀수한 붉은 수은으로 플루토늄 추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991년까지 2차례 더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8킬로의 무기급 핵물질을 확보한 한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남한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북한이 12킬로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진술했다. 1992년 IAEA는 북한 핵사찰 결과를 발표하면서 플루토늄 8㎏을 추출했다고 했는데, 나는 그 후에 붉은 수은 4킬로가 더 확보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12㎏을 추출했다고 밝힌 것이다. 남한에 와서 붉은 수은에 대한 정보를 말해 주었지만, 당시만 해도 남한에서 붉은 수은의 용도에 대해 아는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후 국방과학연구소 신성택 박사가 미국 원자력 학회에서 1980년에 발행한 ????플루토늄 핸드북????이란 책을 읽고 내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1992년 평양시 중이에 건설 중이던 국방대학(현재 김정은 국방대학) 건설도 중단 되었다.
이 사진의 김정은국방대학 건설은 나의 탈북동기가 되었다. 당시 김정일은 중앙당 군수산업 담당비서인 전병호를 불러 지시했다. “자강도 강계시에 있는 국방대학을 평양시에 끌어들여야겠소. 우리나라 군사과학의 전당인 그 국방대학을 곁에 두고 내가 자주 찾아 볼 수 있게 말이오. 그 일을 전병호 비서가 책임지고 맡아 주오.” 그 후 전병호는 평양시 중이에 터를 마련하고, 그곳에 국방대학 건설을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그런데 1년 후, 그 건설이 중단 될 위기에 처했다. 건설 물자를 운반해야 할 자동차 타이어가 이미 다 닳아 버린 데다, 휘발유, 디젤유까지 고갈되다 보니 대학건설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려웠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710호(핵 개발자금)마저 바닥이 나고, 이미 국가 부도가 난 거나 다름없는 형편임에도 김정일은 매일같이 독촉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국방대학 건설을 무조건 끝내라는 것이다. 나는 그 해결사가 되었다. 우라늄생산 공장 준공식이 설비 오작으로 늦춰질 위기에 있을 때도, 그의 해결사 역할을 했듯이 말이다. 당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전병호가 국방대학 건설을 성공적으로 도와주면, 중국과의 합영 회사를 꾸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동무가 국방대학 건설이 완성될 수 있게 노력해 준다면, 동무에게 상좌(대령)의 군사칭호와 함께 무역회사를 차려줄 것이오.” 나는 그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인간의 생명과 자연환경을 무참히 파괴하는 핵개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천리마구역 행정위원장을 만나 강선제강소에서 생산된 강재 8천 톤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합의하고 중국 측과도 계약을 맺었다. 우선은 2천 톤 수출하기로 한 150밀리 직경의 강재를 700밀리 길이로 자르게 하였다. 그 규격이면 중국 쪽에서 원하는 대로 건설자재를 얼마든지 뽑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병호비서의 도움으로 국가 수출승인가격 위원회에는 강재가 아닌 주강뽈(광석을 부수는 쇳덩이)로 승인을 받았다. 주강뽈과 강재의 수출 가격은 1톤당 65달러의 이윤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주강뽈 1톤의 수출가격은 145달러이고, 강제 1톤의 수출가격은 210달러였으니 그 정도의 이윤이 생겼다. 그러니까 국가 수출승인 가격 위원회에는 주강뽈을 수출하는 것처럼 꾸미고, 실제로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강재로 수출하여 그 차액의 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8천 톤의 강재를 수출하여 52만 달러의 이익을 남겨 국방대학 건설을 지원할 수 있었다. 한편 외화가 고갈되어 우라늄생산을 멈춘 원자력 공업부에서는, 710호 자금 확보를 위한 사업을 기피하고 있는 나에게 괘씸죄를 물어 체포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동결된 핵개발이, 마치 나 때문이기 라도 한 듯이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다. 결국 나는 많은 시련을 겪으며 탈북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진은 평양을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사용한 3장의 차표이다. 당시 북한에서 열차 상급침대를 이용하려면 3개의 차표가 있어야 했는데, 기차표, 급행표, 침대표 등이 있어야 했다. 군인은 대령 이상의 신분이 되어야 이 상급침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차표는 길림에서 북경으로 간 차표이다. 김일성주석의 명의로 된 체포령이 중국정부에 의뢰된 후, 중국공안과 북한에서 파견된 체포조에 쫓기며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으로 간 것이다. 당시는 한국대사관에서 탈북자들을 받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적지 않은 탈북자들이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대사관은 정보적 가치가 있는 인사들은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대사관에서 여러 날 지내며, 밤이면 대사 방에서 잠을 자곤 했다.
이 수첩은 본인이 남한에 입국할 때 소지했던 것으로서, 안기부 소지품 검사 때 압수되었다가 도로 찾은 것이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팔린 적이 없는 수첩이다. 그런즉, 이 수첩에 기록된 시와 가사 악보들은 본인의 당시 사상과 감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 한다.
오래 보관된 상태여서 첫 페이지가 떨어졌다. (94년 2월 3일 기록)
천하, 남아로 태어나 역사를 창조함은 숭고한 대사라 내 뜻을 가졌다면 백의 형제 모두 불러 백두산의 불돌로 청기와 집을 짓고저 동해의 푸른 물에 마음의 고름을 삭이며 천세 만세 복락을 누려보리.
이 가사와 악보는 당시 비장했던 각오를 담아서 지은 것이다.
가는 길 위에 가시덤불 막아설적에면 가슴에 사무치는 그날의 추억이여. 천하에 남아로 태어나 젊음에 성공 없다면 내 어이 이 세상에 대장부라 하랴. 가는 길 험난하다 하여도 되돌아서지 말자고 맹세를 다짐한 나의 동포야
내 이 길을 떠날 적에 술잔을 나뉘던 그날의 벗과 맺은 장부의 맹세여 내 청춘 불태우던 그 시절에 품은 뜻 못 이룬다면 내 어이 이 세상에 대장부라 하랴 가는 길 험난하다 하여도 되돌아서지 말자고 맹세를 다짐한 나의 동무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여 지은 가사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지은 가사의 악보이다. 노래 가사 위에 적힌 날짜(94년 3월 31일)는, 본인이 북경주재 한국 대사관에 가기 10일 전에 지었다는 증거이다. 그런즉, 이 노래는 남한으로 올 것을 결심하고 지은 것이다.
내 사랑이 깃들던 나의 집은 야 어디더냐 어디더냐 둘러보니 눈물이 막네. 갈라진 땅에 태어난 이 신세 애달프오. 그대여 이 눈물을 가시어 주소.
우리 언제면 만나랴 총칼 버리고 서로 만나 화해하여 남들처럼 편안히 살랴 갈라진 땅에 태어난 이 신세 애달프오. 겨레여 이 눈물을 가시어 주소.
그날이여 어서 오라 우리 형제가 서로서로 힘을 합쳐 민족 존엄 떨치어 볼 날 갈라진 땅에 태어난 이 신세 애달프오. 겨레여 이 소망을 이루어 주소.
이것은 북한에 두고 온 딸애들을 그리며 지은 노래가사이다.
밤하늘에 웃는 애기별국경 넘어 비쳐 올적에 널 그려 보았단다. 아가야 나의 아가야 곱고 고운 네 삶의 꽃신 사 가지고 가려니 기다려라 이 아버지 기다려다오. 창공에 하얀 배 한 척 저 산 넘어 멀리 갈 적에 내 마음 싣고 간단다. 아가야 나의 아가야 곱고 고운 네 삶의 꽃신 사 가지고 가려니 기다려라 이 아버지 기다려다오.
이것은 아내를 그리며 지은 가사와 악보이다. (수첩 컬러가 좀 흐린 것은, 다른 프린트로 복사해서 그렇다.)
내 마음 은하수에 흠뻑 적시면서 끝없이 떠가는 곳 사랑의 행성 날 그리는 님의 맘은 어느 별에 사무쳤나 그 별님 어데 있나. 나의 별- 나의 별은.
두 눈을 꼭 감으면 다른 하늘이 있지 추억을 먹고 사는 별들이 있네. 그 별들이 밤이 오면 굶주림에 허덕이며 애타게 부르짖네. 사랑의 추억들을
그리워라 그대의 노래여 그리워라 그날의 추억이여 오늘 밤도 나의 하늘은 하얗구나.
이 노래의 2절은 북경주재 한국 대사관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이국에 들 가에 봄이 와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데 외로운 이맘엔 비가 내려요. 하늘아 그쳐다오. 네가 울면은 내 나비 못 난다 자유를 찾아 못 간다.
북경에 거리에 달이 떠 봄맞이한 웃음이 넘친데 이맘엔 우레가 슬피 울어요. 하늘아 그쳐다오. 네가 울면은 내 나비 못 난다 그 향기 찾아 못 간다.
당시 한국 정보기관이 극비리에 파견한 군함을 타고 인천항으로 입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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